아주신씨 시조는 신익휴. 신흘, 성은공, 영남유림들은 아주신씨를 이렇게 알고 있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기 시조를 부정하는 자이다. 항간에 시조에 대해 신영미를 주장하는 이가 있고, 경거망동하는 자들이 있는데 근거가 없다. 향산 이만도는 시조 신익휴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고, 신영미에 대한 언급은 없다. 향산 퇴계의 후손으로 장원급제한 유명한 인물이다. 영남의 선비들은 아주신씨들을 향산 이만도처럼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향산 이만도의 <성은 신흘>의 행장에는 아주신씨 시조 신익휴와 아주신씨 조상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글을 쓴 향산 이만도는 영남유림의 큰 인물이었다. 李晩燾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경상북도 예안 출신.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그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흘 申仡, 조선의 명현 의성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구지(懼之), 호는 성은(城隱). 아버지는 신원록(申元祿)이며, 의성(義城) 사람이다.
[활동 사항]
신흘(申仡)[1550~1614]은 아버지가 사망하자 삼년상을 마친 후 묘소 아래 집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고 애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가 교수(永嘉敎授)를 지냈다. 전쟁이 일어나자 형인 신심(申伈)을 도와 창의하였다. 의병을 일으키고 수 백 명을 모집하여 김해(金垓)·유종개(柳宗介)·정세아(鄭世雅)와 함께 왜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하였다. 1603년(선조 36) 조정의 명으로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다. 1608년에는 종질인 신홍도(申弘道)와 함께 회퇴[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두 분의 변무소(辨誣疏)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5)에는 정인홍이 국정을 농락하고 성현을 모함한 무현죄(誣賢罪)로 논핵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는 어지러운 세상에 나서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고요함을 지켰으며, 경전과 역사책을 보면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아들 삼형제[신적도, 신달도, 신열도]를 잘 교육하여 충신, 정치인, 학자로 키웠으며, 이로써 의성 지역 명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특히 읍파인 광부(光富) 계열이 중추가 되어 전성기를 열었다.
[저술 및 작품]
『난중사적(亂中事蹟)』을 편찬하였고, 유집으로 『성은일고』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향산집
17권 행장(行狀)
성은 신공의 행장〔城隱申公行狀〕
공은, 휘는 흘(仡), 자는 구지(衢之), 호는 성은(城隱)이며 성은 신씨(申氏)이다. 고려 태사 장절공(壯節公) 휘 숭겸(崇謙)의 12세 후손 문하시랑 휘 익휴(益休)가 아주군(鵝洲君)에 봉해져, 이곳에 적(籍)을 두게 되었다. 그 4세손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유(允濡)는 정숙(貞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안렴사(按廉使) 우(祐)는 일찍이 포은(圃隱)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에게 배워 대의(大義)를 들을 수 있었고 고려가 운이 다하자 길야은(吉野隱)을 이끌고 향리로 돌아왔다. 호는 퇴재(退齋)이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를 살아 효행으로 정려(旌閭)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수록되었으며,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 광부(光富)는 우리 조정에서 벼슬하여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간원)의 직책을 역임하고, 직간을 하다가 내부령(內府令)으로 좌천되었다. 이분이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낸 사렴(士廉)을 낳고, 사렴이 성균 생원 석명(錫命)을 낳았으니, 공에서부터 4대 위이다. 증조부 휘 준정(俊禎)은 교수를 지냈고, 조부 휘 수(壽)는 인물이 뛰어나고 큰 절조가 있어 여러 번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 휘 원록(元祿)은 효우와 어진 행실이 있었고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역시 정려(旌閭)되고 《삼강행실도》에 수록되었다. 호는 회당(悔堂)이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모친은 숙부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경은(耕隱) 선생 이맹전(李孟專)의 증손자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지원(李智源)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5) 9월 9일에 의성(義城) 원흥동(元興洞)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너그럽고 화락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제자(弟子)의 직분을 잘 지키고 그 나머지로 학문에 힘을 써, 굳이 이끌고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성취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에 부친 회당공이 세상을 떠나자 죽을 마시고 거적에서 자면서 상례를 행하기를 과도하게 하고, 장사하고 나서는 여묘(廬墓)를 살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그 후에 묘하(墓下)에 몇 칸의 집을 짓고 영모재(永慕齋)로 편액하여, 평생 슬픈 마음으로 살피는 장소로 삼았다.
임진년(1592)에 외침(外侵)이 일어나자 모친을 모시고 황학산(黃鶴山)으로 들어가, 전란이 어지러운 중에서도 몸을 편히 모시고 뜻을 받드는 데 모든 방도를 다하였다. 얼마 안 있어 삼경(三京 서울ㆍ개성ㆍ평양)이 함락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백씨 흥계공(興溪公)과 더불어 두려워하고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으며, 앞장서 의병을 일으키자 열흘 동안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흥계공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고, 편지로 김공 해(金公垓), 유공 종개(柳公宗介), 정공 세아(鄭公世雅)와 약조하여 일직현(一直縣)에 있는 정자(亭子)에서 회동하였으며, 마침내 좌위(左衛)와 우위(右衛)로 나누고 세력을 합쳐 적에 대항하였다. 의로운 함성이 한번 터지자 사람들이 마땅히 죽을 곳을 알고, 나약한 자는 기운을 내고 겁 많은 자는 용기를 냈다. 비록 전장에 나아가 적의 목을 벤 공은 없지만 근방의 네다섯 고을이 이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실로 공이 도우고 꾸민 덕택이었다.
이듬해 봄에 모친의 병이 깊어지자 공은 밤낮으로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상을 당하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으로 애훼하였으며, 장사(葬事)와 제사에는 한 가지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탄식하기를 “지난날 과거 보는 일에 마음을 끓이고 뜻을 바쳤던 것은 부모를 영예롭게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금 두 분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이제 누구를 위하여 다시 하겠는가.” 하고,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매일 정주학(程朱學)의 책들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고 그 뜻을 끝까지 궁구하여 때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장여헌(張旅軒 장현광(張顯光)), 서낙재(徐樂齋 서사원(徐思遠)) 두 선생과 매우 친하게 지내어 서로 만날 때마다 항상 경전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한번은 장 선생을 위하여 〈여헌설(旅軒說)〉을 지으니 선생이 보고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계묘년(1603, 선조36)에 조정의 명으로 최인재(崔訒齋) 등 제현(諸賢)과 더불어 《난중사적(亂中事蹟)》을 찬집하여 편수청(編修廳)에 올렸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 상공(李相公 이원익(李元翼))이 이 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공이 기록한 글을 보고 고증이 정박(精博)하고 문장이 전아(典雅)하며 기사의 체요(體要)를 잘 파악하였다고 인정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일도(一道)의 선비들을 이끌어 종질 홍도(弘道)와 함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위한 신변소(伸辨疏)를 올렸다.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정인홍(鄭仁弘)이 요로에 있으면서, 퇴계 선생이 일찍이 자기 스승인 조남명(曺南冥 조식(曺植))과 성대곡(成大谷 성운(成運)) 두 선생의 병폐를 지적하고 중도(中道)를 허여하지 않았다 하여, 퇴계 선생을 처음 문묘에 제향(躋享)할 때 함부로 무함하고 핍박하는 말을 하였다. 공이 그 소식을 듣고 분연히 말하기를 “이 일은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다.” 하고, 이에 퇴계와 남명 두 선생이 서로 허여한 의리를 찾아내어 정인홍의 주장을 반박하고, 대궐에 나아가 진소(陳疏)하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모(李某 이황을 가리킴)가 조모(曺某 조식을 가리킴)와 성모(成某 성운을 가리킴)를 일러 ‘남을 업신여기고 세상을 가볍게 여긴다.’라고 하고, ‘노장(老莊)에 물들었다.’라고 하고, ‘중도(中道)라고 하기 어렵다.’라고 한 것은 그들이 벼슬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기상을 논하여 치우친 데가 있음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니, 그들을 이끌어 크고 지극한 중정(中正)의 도로 돌아가고자 한 것을 언외(言外)에서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정인홍은 처신을 고상(高尙)히 하는 것을 중용(中庸)이라고 잘못 알아서 조모와 성모가 이모로부터 무함을 받았다고 하고, 또 과거(科擧)를 통하여 발신한 것을 가지고 머뭇거리며 세상에 영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알기로 조모가 과거 공부를 그만둔 해는 이모가 이미 높은 벼슬에 오른 뒤였는데, 만약 조모가 일찍 급제하였다면 그래도 머뭇거리며 세상에 영합하였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가정(嘉靖) 을사(1545, 인종1) 연간을 벼슬하여서는 안 되었던 때라고 하였는데, 만약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주선한 것을 가지고 도를 잃은 것이라고 한다면 영무자(甯武子)가 어찌하여 성인에게 일컬음을 받았겠습니까. 이모는 천성이 순수하고 실천이 독실하며, 그 말과 글은 실로 선성(先聖)의 유지를 밝히고 후학(後學)에게 모범을 보였으니, 참으로 일상의 곡식과 의복처럼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인홍은 이모를 문학(文學)으로 지목하면서 ‘문장을 쓰는 데 깊이 빠지는 걱정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는 주자(朱子)가 이것으로 양명(陽明)에게 무함을 당한 것이니, 어찌 오늘날 다시 이런 말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조모가 일찍이 이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선생 같은 분은 자신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제가 평소 경모하기를 하늘의 북두성처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아름다운 문덕(文德)이 있는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경모하는 뜻이 지극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모의 말은 백세(百世)에 확실히 전해지는 것인데도 정인홍처럼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가 도리어 다른 주장을 외치니, 이는 비단 이모를 알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스승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 저 정인홍은 산림에서 명망을 얻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한마디 말을 내어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하고 있는 데다, 지금 성상의 돌봄을 받아 마음에 믿는 바가 있어 마음대로 붓을 놀리고 내키는 대로 말을 하여 사람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기까지 합니다. 이런 행실이 가져오는 폐단이 장차 인륜을 없애고 천리를 해치는 데까지 이를 것인데도 전하께서 바로 변척(辨斥)하지 않고 도리어 우악하게 허여하니, 신등은 사설(邪說)이 횡행하는 폐해가 장차 이로부터 점점 더 심해질까 두려워합니다.”
상소가 들어가자 폐주(廢主 광해군)가 윤음을 내려 부드럽게 타일렀다.
당시 조정에 흉악한 사람들이 가득하여 사류(士類)에게 화(禍)를 씌우는 짓을 일삼았으나, 그래도 이 일로 공을 해치지는 못하였다. 공은 세상일이 점점 어그러지는 것을 볼 때마다 항상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하였고, 일찍이 안동 교수(安東敎授)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자식들에게 과거를 위한 글을 배우지 말도록 하고서 “지금은 선비가 벼슬에 나아갈 때가 아니니, 오직 문을 닫아걸어 자취를 감추고, 말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여 조상의 덕에 누(累)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갑인년(1614, 광해군6) 6월 27일에 병으로 정침에서 임종하니, 향년 65세였다. 오호라,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유하고 순수하며 마음이 자애롭고 진실하였다. 평소에 장엄하고 경건하게 처신하여 말을 빨리하고 안색을 급하게 바꾸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조용히 혼자 있을 때라도 태만한 모습을 짓지 않았다. 언제라도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을 느슨히 한 적이 없으니, 제삿날이 돌아올 때마다 미리 목욕재계하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맞게 하되 정결하게 하는 데 힘써서 신명(神明)이 와 계신 것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백형(伯兄)을 섬기는 데 친애와 공경을 다하고, 아들들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의방(義方)으로 하였으며, 선생 장자(先生長者)의 문하에 유학시켜 그들이 성취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일찍이 시를 지어 격려하기를,
몸가짐은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고 / 持身如履薄
마음가짐은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들듯이 하라 / 操心若奉盈
나태하지 말고 함부로 하지 말아서 / 毋情又毋荒
너의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마라 / 毋忝爾所生
하였다.
향당(鄕黨)에서는 몸가짐을 공손하게 하고, 누구라도 상을 당하면 달려가서 조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고 남과 시비를 다툰 적이 없었으나, 호오(好惡)와 취사(取舍)는 한결같이 의(義)를 가지고 결단하였으며 도를 굽혀 남과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계사년(1593, 선조26), 갑오년(1594)의 병란과 흉년에는 죽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는데도 굶주리는 친척은 반드시 구휼하였으며,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힘들게 고생하여 살림을 꾸려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보는데, 이것은 천명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젊을 때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두었으나 반평생을 초야에서 살았고, 낙척(落拓)하고 불우(不遇)하여 문을 닫아걸고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유유히 홀로 터득한 흥취를 간직하였으나, 글을 지을 때는 공교롭게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말이 통하고 이치가 순하게 할 따름이었다.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7)에 아들 달도(達道)가 공신으로 녹훈(錄勳)되어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박천상(朴天祥)의 후손이자 전력부위(展力副尉) 박륜(朴倫)의 따님이다. 남편을 섬기는 데 부덕에 어긋남이 없었고, 자녀를 가르치는 데 엄격하게 법도를 지켰다. 공과는 같은 해에 태어났고, 세상을 떠난 것도 같은 해 4월 16일이었으며, 고을 남쪽 오토산(五土山) 태향(兌向)의 언덕에 공과 합장하였다. 아들과 딸을 세 명씩 두었다. 장남 적도(適道)는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고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며,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호는 호계(虎溪)이며 단구서원(丹丘書院)에 배향되었다. 차남은 달도(達道)로, 홍문관 수찬을 지냈고 정묘년(1627)에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영사 공신(寧社功臣)에 들었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호는 만오(晩悟)이다. 막내아들은 열도(悅道)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병자년(1636, 인조14)과 정묘년에 척화를 주장하였다. 호는 나재(懶齋)이며 역시 단구서원에 배향되었다. 장녀는 김유엽(金有曄)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주부(主簿) 임내중(任乃重)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첨정(僉正) 박종경(朴宗敬)에게 출가하였다.
호계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집(㙫), 차남은 균(均), 삼남은 진사 채(埰)이고 막내는 점(坫)이다. 딸은 김상각(金尙珏), 현감 정복형(鄭復亨)에게 출가하였다. 만오(晩悟)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위솔(衛率) 재(在)이고 차남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낸 규(圭)이며, 막내는 무(堥)이다. 딸은 윤이관(尹以觀), 참봉 박충기(朴忠基)에게 출가하였다. 나재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㙨), 차남은 급(圾), 삼남은 감(堪), 사남은 전(塼), 막내는 성(垶)이다. 딸은 김종원(金宗源), 주서 권주(權霔)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두 아들 증(增)과 벽(壁)을 두었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적지 않는다.
공의 10세손 돈식(敦植)이 일월산(日月山) 속으로 나를 찾아와, 공의 유고(遺稿)를 꺼내 보이면서 굳이 고쳐 주기를 청하고 이어서 행장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데, 나의 분수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고의 글 속에서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과 신해년(1611)에 올린 두 상소문을 읽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셨다. 오호라, 인륜(人倫)을 무너뜨리고 정도(正道)를 해친 것이 어찌 저처럼 심하였던가. 만약 당시 정인 군자(正人君子)다운 인물이 말을 하여 물리치고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않았다면 저 가라지 같은 존재가 몰래 자라나는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니 공이 후세에 공적을 끼친 것이 어찌 다만 한때에 오랑캐를 물리친 공적뿐이겠는가. 이 못난 후배가 어찌 감히 이 일에 무심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위와 같이 억지로 고치고 순서를 지어, 최인재(崔訒齋) 선생이 지은 묘지문(墓誌文)의 아래를 채웠으니, 오직 세상의 군자들이 참고하고 채택하기 바라노라.
[주D-001]구지(衢之) : 《인재집(訒齋集)》 권12 〈증승지신공묘지(贈承旨申公墓誌)〉에는 ‘衢’가 ‘懼’로 되어 있다.
[주D-002]길야은(吉野隱)을 …… 돌아왔다 : 야은은 길재(吉再)의 호이다. 길재는 신우(申祐)의 조카사위였으므로 같은 시기에 개경을 떠나 함께 영남 지방으로 내려왔고, 각각 선산(善山)과 의성(義城)에서 살았다.
[주D-003]김공 해(金公垓) : 김해(金垓, 1534~1593)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이다.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남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분전하다가 진중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근시재집》이 있다.
[주D-004]유공 종개(柳公宗介) : 유종개(柳宗介, 1558~1592)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계유(季裕)이다.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을 근거지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주D-005]정공 세아(鄭公世雅) : 정세아(鄭世雅, 1535~1612)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이며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영천(永川)에서 적을 무찔렀다. 저서로 《호수실기(湖叟實記)》가 있다.
[주D-006]최인재(崔訒齋) : 최현(崔晛, 1563~164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이며 호가 인재(訒齋)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부제학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예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저서로 《인재집》이 있다.
[주D-007]정인홍(鄭仁弘) : 1535~1623.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이다. 임진왜란 때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웠고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영의정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 참형을 당하였다.
[주D-008]함부로 …… 하였다 : 1610년(광해군2)에 오현, 즉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는데, 정인홍은 자신의 스승인 조식(曺植)이 포함되지 않고 이언적과 이황이 종사된 데 불만을 가졌고, 1611년에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이록(利祿)을 탐내고 진퇴가 분명하지 않으며 몰염치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였다.
[주D-009]가정(嘉靖) …… 하였는데 : 1611년(광해군3)에 정인홍이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에서, 을사년(1545, 인종1)과 정미년(1547, 명종2)에 사화가 일어나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 이언적과 이황이 벼슬을 그만두지 않고 소인들과 같이 행동하였다고 비난한 일을 말한 것이다.
[주D-010]영무자(甯武子)가 …… 받았겠습니까 : 영무자는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대부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었으니, 그 지혜는 따를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한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황을 영무자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1]무신년과 …… 상소문 :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이언적(李彦迪)을 옹호하기 위하여 올린 신변소(伸辨疏)와 신해년(1611, 광해군3)에 정인홍(鄭仁弘)의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의 내용을 반박하기 위하여 올린 상소문을 말한다.
[주D-012]한때에 …… 공적 : 신흘(申仡)의 세 아들 신적도(申適道)ㆍ신달도(申達道)ㆍ신열도(申悅道)가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의 호란(胡亂)에 의병을 일으키고 척화(斥和)를 주장한 일을 말한다.
[주D-013]최인재(崔訒齋) …… 묘지문(墓誌文) : 최현(崔晛, 1563~1640)의 문집인 《인재집》 권12에 신흘(申仡)의 묘지문인 〈증승지신공묘지(贈承旨申公墓誌)〉가 실려 있다. 인재(訒齋)는 최현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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