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結繩’에 對한 一硏究
申 斗 煥(韓國, 安東大學校 漢文學科)
-目次-
問題의 提起
漢字의 起源과 結繩
結繩에서 書契로
結論
<국문초록>
이 논문은 漢字의 起源에 대한 敎育과 硏究의 一環으로 中國 古代의 結繩에 대해 硏究한 것이다. 한자를 교육하는 교사들은 한자의 기원을 교육할 때 결승을 언급한다. 5000년 중국 역사의 모든 문헌에는 蒼頡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제시대는 결승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결승은 언제 태동되어서 어떻게 발전되다가 어떻게 소멸되었을까? 결승은 정치에 활용되면서, 수많은 형태의 결승문자로 발전되었으며, 결승의 다양한 표현은 문자의 형태로 대신하여 표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許愼의 「說文解字·敍」에도 蒼頡은 결승을 바탕으로 서계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승은 易의 卦象 으로 발전되었으며,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설도 있다. 老子를 비롯한 중국의 많은 문헌에는 결승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들을 바탕으로 결승을 도출해서, 결승이 사용된 근거들을 찾아 고증하였다. 결승은 서계가 만들어 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결승을 만들어서 이용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1899년에 발견된 갑골문자는 한자의 기원과 발전을 고증해 주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중국의 고대의 유적에서, 한자의 기원으로 보이는 다양한 刻畫符號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탄소 시험결과 6000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다른 문자의 파편은 8000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련의 중국 문자학 연구자들은 이 刻畫符號를 한자의 기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술된 창힐의 조자설 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중국 역사의 서술 범위를 한 참 벗어난 시기이다. 이 刻畫符號들과 서계의 상관관계를 살펴서, 결승의 기원과 발전을 바탕으로 그 상관관계를 고증해 보았다.
許愼은 “蒼頡이 結繩을 바탕으로 새의 발자국에서 착안하여 書契를 만들었다”고 했다. 결승의 다양한 문자들은 서계의 유형과 많이 닮아 있다. 결승은 서계를 태동시켰고, 서계는 결승문자들을 품고 있다. 한자의 기원은 結繩에서 시작되었고, 書契로 발달되어 사용되었다. 이 書契가 점점 발전하여 다양한 조합을 거치면서 한자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승은 한자의 기원과 관련된 다양한 상상력의 기저가 되고 있는 것을 고대 문헌을 통해 고증해 본 것이다.
주제어 ; <漢字의 起源>, <結繩>, <書契>, <刻畫符號>, <蒼頡>.
1. 문제의 제기
自鳥跡代繩 새의 발자국이 결승을 대신하면서부터
文字始炳 문자는 비로소 분명해졌다.
<문심조룡. 원도>
한문학에 입문하면서 漢字의 起源에 대한 언급은 피할 수 없다. 그러면서 中國 古代의 結繩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자학 방면에서도 결승에 대한 연구의 지평이 너무나 없다. 漢字의 起源에 대한 敎育과 硏究의 一環으로 中國 古代의 結繩에 대한 담론의 확장은 매우 필요한 시점이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초의 문자인가? 한자의 기원에 관하여, 중국 5천년 이래의 모든 역사 문헌에는 ‘황제의 사관이었던 창힐이 문자를 창조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모든 문헌에도 창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결승에서 문자가 유래되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대부분 교과서에서도 창힐의 조자설을 사용하고 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대부분 교과서도 창힐의 조자설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1899년 갑골이 출현하면서부터 창힐의 문자 창조설은 위축을 받고 있다.
중국은 1919년 5·4운동을 거치고,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전통 사상을 부정하고 서학을 숭배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결과 중국의 많은 전통사상이 붕괴되고, 전통문화가 파괴되었다.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설을 부정하는 경향이 일어나자 중국의 많은 네테즌들은 중국의 전통학설을 반대하고 서양의 학설을 인용하여 함부로 창힐의 문자 창조설을 부정한 것에 대해 비난의 글이 난무하면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한문 교사들은 한자를 가르치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한자의 기원을 언급하게 된다. 최근에 일부학자들은 ‘漢字는 우리 동이족이 만들었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한자를 최초로 만들었다는 글을 실어 배포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가 당연한 듯, 인터넷 상에 만연되고 있어, 한문 교육에 많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한문 교사들은 한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結繩’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연민 이가원은 그의 『한문신강』, <문자편>에서 한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結繩ㆍ書契ㆍ八卦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여기서도 창힐을 한자의 창제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 고대의 結繩에 대한 연구논문은 단 한 편도 없다. 한자는 언제 어떻게 기원한 것인가?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역사이며, 예술이며, 신화이며, 전설이다. 우리는 서구의 학문적 경향을 벗어나, 황하문명의 고대문자인 결승에 대하여, 문자학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모든 문헌은 황제 때 사관인 蒼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화적인 미봉책으로 한자의 기원을 서술한 것으로 문제가 많아 보인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한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최초로 사용된 것은 結繩이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한자의 기원을 설명해 가다가 보면 신화와 역사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만다.
대부분 중국의 학자들은 중국 최초의 문자를 1899년 중국 안양에서 발견된 상나라 갑골문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갑골문자는 이미 많은 문자들이 문자의 형태로 발전된 채 형성되어 있어서 그 완성도가 이미 높은 단계에 와 있었다. 그 이전의 어떤 발전 단계들을 거쳐서 갑골문자시대 까지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과연 은허시대 갑골문자가 최초의 문자일까?
대부분의 문자 학자들은 한자의 기원을 논할 때, 갑골을 말하고 결승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자의 기원을 교육할 때, 결승을 제외하고서 문자의 기원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결승을 설명 해야만 한다.
중국 고대 문헌에서는 결승에서 문자로 나아갔다는 설이 많다. 또 주역의 팔괘는 결승에서 발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설에서 결승문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자들이 긍정하고 있다.
결승은 언제부터 생성되어 어떻게 성장 발전하다가 어떻게 쇠퇴하였을까? 결승의 문자적 형태나 그 고대에 사용 된 흔적, 그리고 글자의 수 등은 유추될 수 있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고대의 결승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그것은 자료에 대한 부족으로 논문을 형성해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결승은 그저 단순한 몇 가지 형태로 원시문화에서 사용되었던 신호체계로 추측하고 말 뿐, 이것이 복잡다단하게 발전하여 문자를 대신한 정치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 까지 감안하여 연구해볼 생각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결승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잉카제국의 결승 문자 퀴푸(quipu)는 하나의 긴 끈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48개의 제2의 끈을 묶어 늘어뜨리고, 제2의 끈에 다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된 제3의 끈을 매단 것이다. 끈을 매듭지어 단단위·10단위·100단위를 나타냈으며, 왕실용은 노끈의 색깔을 달리하여 공물·토지·생산물·의식 및 전쟁과 평화 등 다양한 국가 업무를 나타냈다. 퀴푸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보전되었으며 판사, 사령관, 대가족의 수장 등과 같은 수도 쿠스코의 고위 관리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지휘관과 마을의 수령들도 퀴푸를 사용했다. 이 퀴푸(quipu)는 연구되어 이미 두 종류의 책으로 나왔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결승에 대한 연구는 요원해 보인다. 중국의 고대문헌에는 결승이 수없이 언급되고 있다. 중국 고대의 결승은 반드시 연구되어야 한다.
이 연구는 중국 고대 결승에 대한 연구의 시론으로서, 이러한 결승의 문제제기를 해결하기 위해 그 구체적 증거를 찾아 떠나는 고증의 여행이기도 하다.
結繩이란 세끼나 나무뿌리로 묶었던 매듭을 말하는 것으로 문자 발명 이전에 사실을 기록했던 일종의 기사방법이다. 結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자가 없던 시대에 여러 민족들에게서 소통의 방식으로 사용되었던 최초의 문자적 符號라는 점은 대부분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문자가 형성된 계기가 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대부분 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중국 한자에 대한 기원을 연구해온 문자 연구가들에 의해 축척된 연구들은 많은 새로운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자의 기원 속에 등장하는 結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언급할 뿐 한편의 연구 논문도 없으며, 여전히 그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점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동안 축척된 선현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다소 막연하나마 결승에 대해 고찰하고, 결승에서 한자가 유래된 그 구체적인 정황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결승의 흔적을 찾아서.
自鳥跡代繩 새의 발자국이 결승을 대신하면서부터
文字始炳 문자는 비로소 분명해졌다.
<문심조룡. 원도>
유협은 『문심조룡』 「원도」편에서 한자의 기원에 관하여, ‘ 황제의 사관이었던 창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결승을 대신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으며 이로부터 문자가 발전했다고 한자의 기원에 대해 결승을 언급하였다. 즉 결승에서 문자가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9년 갑골이 출현하면서부터 창힐의 문자 창조설은 위축을 받고 있다.
郭沫若은 문자는 刻畵 符號에서 기원하였다고 하고, 唐兰은 문자는 圖畵에서 기록하였다고 하고, 鲁迅이나 郭沫若 같은 학자는 문자는 노동인민이 창조한 것으로 한사람이 한 시기에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설은 잘못된 것인가?
황제 시대의 결승과 ‘蒼頡造字說’은 비록 신화적 단계의 미봉책으로 설명되긴 했지만 중국문자학 연구의 근간이 되고 있었던 학설이다. 하루아침에 부정한다는 사실이 온당한 것인가? 이에 대한 논쟁이 최근에 중국 인터넷상에서 뜨겁게 대두되고 있다.
한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신화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설명이 가능한 것인가? 한자를 교육하면서, 그 글자의 유래를 설명하다가 보면, 그 글자에 유추되는 고대의 문자발달과정은 역사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설명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책이 『說文解字』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결승을 언급하고 있고, 결승에서 서계로 발전되는 ‘蒼頡造字說’ 주장하고 있다. 만약 ‘蒼頡造字說’을 부정한다면 이 책도 보지 말아야 하고, 이 책을 가지고 문자를 연구해서도 안 된다.
최한기는 “文字는 바로 언어를 통하는 標識이다.”라고 했다. 문자는 언어를 점, 선, 그림 등으로 표현하는 시각적 부호이다. 어떤 민족의 문자든 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청각에서 시각으로, 사회적 약속이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
문자의 형성은 결코 한 사람에 의한 것도, 일시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발전을 따라 상상력과 창조력을 바탕으로 필요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해 왔으며,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민족의 생명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거대한 외압을 받지 않는 한은 문자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부단히 발전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지닌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신진대사를 해 왔으며, 그 신진대사는 잠시도 멈춘 적이 없고, 또 멈출 수도 없는 것이다. 결승도 그렇게 발전했을 것이다. 한자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기원한 것일까?
결승은 언제 태어나서 어떻게 활용되다가 언제 없어졌는가? 최근에 와서 신화시대가 과학의 발달로 점점 더 역사화 되어가고 있다. 신화시대보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역사 이전의 잃어버린 역사를 신화적 미봉책으로 서술했을 수도 있다. 문자학연구에서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近代이래 중국고고학계에서는 殷墟甲骨文보다 이른 시기 漢字의 起源과 관련된 出土资料들을 발굴하였다. 仰紹文化시기의 半坡遺址、大汶口黑陶 및 고대 사회의 흔적인 陶器 상의 刻畫나 彩繪符號,소량의 갑골에 새겨진 刻畫, 玉器, 石器 등 상면의 符號들이 그것이다. 이들을 포괄하여 ‘原始社會晚期’라고 한다. 그 중 최초의 刻畫 符號는 중국 河南省 舞陽縣 舞渡鎮 賈湖村에서 발견된 것들로 약 8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련의 전문가들은 이것에 근거하여 刻畫가 한자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刻畫符號說” 과 “圖畫說”이다.
刻畫란 무엇인가? 각화는 각획과 도화이다. 각획은 한자의 기원에 비추어 볼 때 결승 다음에 나타나는 최초의 문자이다. 결승과 刻畫의 관련성을 찾아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100만 년 전에 중국 雲南省 元謨에서 최초의 원시인류인 元謨人이 발견되었고, 약 50만 혹 40만 년 전에 北京 周口店 일대에서 직립 보행하고 간단한 도구를 사용할 줄 알며 불을 사용하였던 北京人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중국 대륙에는 인류가 살아 왔다고 추정된다. 4~5만년전 현생 인류들이 살기 시작했고 1만 년 전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 8천 년 전에 중국에 이미 刻畫들이 발견된다. 그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이들은 어떻게 신호를 사용하며 생활하였을까? 그들은 계속 진화하면서 살아온 흔적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인류가 산 것은 적어도 4~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들은 부단히 기억과 상실을 경험하며, 기억을 위해 땅에 그리고, 바위에 새기고, 소통의 편의를 위해 결승 같은 다양한 기록의 도구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 되었을 것이다.
근대 이래로 중국고고학계에서는 殷墟甲骨文보다 이른 시기 漢字의 起源과 관련된 出土资料들을 발굴하였다. 그 중 최초의 刻畫 符號는 중국 河南省 舞陽縣 舞渡鎮 賈湖村에서 발견된 것들로 약 8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련의 전문가들은 이것에 근거하여 한자의 기원을 刻畫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刻畫란 각획과 도화를 합친용어이다. 이것이 “刻畫符號說” 과 “圖畫說”이다. 그렇다면 이 刻畫는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약 7천 년에서 6천 년 이전 黃河유역과 長江유역에서 출현한 仰韶문화는 모계 씨족사회를 구성하였고, 약 5천 년 이전 황하유역에서 출현한 龍山문화는 부계씨족사회를 구성하였으며, 이 두 역사단계에 인류는 이미 각종 석기를 마제할 수 있었고, 도기를 발명하였다. 이때 발견된 도기에는 문자의 기록이 발견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설명되어온 중국의 역사시대를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게 했다.
『周易 繫辭傳下』에서 “상고시대에는 結繩으로서 나라를 다스렸고 후세의 성인 이것을 書契로 바꾸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위 인용문에서 ‘結繩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은 이미 단순하고 간결한 몇 개의 결승이 아니라 복잡다단하고 다양하게 정치에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에는 결승으로 정치를 하였다. 정치에 활용되려면 어느 정도의 결승이 활용되었을까? 이미 결승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결승은 이미 문자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孔穎達의 注疏에는 “結繩이란 것은 鄭康成의 注에 이르기를 일이 큰 것은 그 줄을 크게 매었고 일이 작은 것은 그 줄을 작게 매었다. 뜻도 그러한 듯하다.”라고 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이미 결승은 정치문자로서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결승은 큰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여 표시하였고, 여기에서 더욱 발전하여 정치에 구체적으로 사용된 정황이 포착되고 있는 샘이다.
晉나라, 葛洪은 『抱樸子.鈞世』에서 “만약 배가 건너는 것을 대신하고, 수레가 걷는 것을 대신 했다면, 문자와 墨書는 결승에서 개조되어 여러 후세의 뛰어난 자들이 지어서 傳書에 잘 활용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갈홍은 이미 結繩에서 漢字가 起源 되었을 가능성을 확신했다. 배와 수레처럼 인간생활에 편의를 도모할 정도로 결승은 이미 문자로서 활용되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老子는 “使民複結繩而用之” 즉 “백성들로 하여금 결승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사용하게 하여 편의를 제공한다.”라고 하였다.
老子는 결승의 문자를 창조하여 백성의 삶이 편리하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결승은 이미 정치의 중심에 등장하여, 백성들에게 서로 통용되게 하여 백성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의지가 보인다. 결승은 이미 다양하게 창제되어 통치의 도구로 활발하게 통용되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역사에서는 원시사회 말기에 황하유역에는 이미 많은 부락이 분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전설상에 의하면 三皇·五帝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黃帝를 우두머리로 하는 부락이 비교적 강대하고 문화도 비교적 선진적이었다고 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 문자를 연구하다가 보면 중국의 역사 범위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三皇五帝시대 역사인 三墳五典과 고대 지리서인 八索九丘라는 책이 있었다고 전한다. 左傳 昭公 12년의 기사에, 左史의 依相이 왕을 뵘에 왕이 “그대는 훌륭한 史官이라 三墳五典과 八索九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서 신화시대의 유물로 신화적 미봉책으로 기술되고 있다. 문자학의 연구는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없어 보인다. 충돌은 융합을 거친다. 문자학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로 발전되어 갈 수도 있다.
이상의 논의에서 볼 때, 결승은 ‘蒼頡造字說’을 부인하더라도 결승은 오래 동안 정치의 도구로서 사용되었고, 수많은 결승문자들이 통용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後漢시대 최고의 문자 학자였던 許慎(58~147)이 지은 『說文解字』는 가장 오래된 중국 문자학 연구의 선구이다. 그 서문을 바탕으로 한자의 기원을 찾아가 본다.
옛날 복희씨가 세상을 다스릴 때, 우러러 하늘에서 모양을 관찰하고 굽어보아 땅에서 그 이치를 살펴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관찰하였다. 가까이는 사람의 몸에서 그것을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그것을 취하였는데, 이에 팔괘를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으로써 역법으로 정한 도형을 드러내었다.
황하문명의 문자의 기원은 河圖와 洛書에서 비롯된다. '하도'는 伏羲氏 때 黃河유역에서 나온 龍馬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그림이고, '洛書'는 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洛水에서 나온 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글이다.
복희는 하도에 의해 八卦를 그렸고, 우는 낙서에 의해 洪範九疇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각각 별개로 취급되던 하도와 낙서가 병기된 것은 『史記 · 孔子世家』와 『淮南子·俶眞訓』이며, 거기에는 하도낙서가 태평치세에 나타나는 祥瑞로 설명된다.
人文之元 인문의 근원은
肇自太極 태극에서 비롯된다
幽贊神明 그윽한 신명의 도움으로
易象惟先 역경의 괘상이 처음 나타났다
庖犠畫其始 복희씨가 비로소 팔괘를 그렸고
仲尼翼其終 공자가 십익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문심조룡. 원도>.
중국 육조 시대 양나라 유협(465~521)이 지은 <문심조룡>보다
『주역』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지금까지 주역의 작자를 복희씨에 묶어두고 주역은 결승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해 오고 있다. 아울러 이때까지 주역의 연구는 그 원형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주역은 복희씨가 지었다고 하나 그 근거가 미약하고 주역의 괘상은 신화시대의 문자로서 어느 한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는 보기 힘들다. 주역이 탄생되던 황하문명의 상고시대 인류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태초의 인류들은 대자연의 경이로운 하늘과 신비한 땅과 그 속에서 대자연의 섭리를 극복하며 생활하는 지혜를 터득했을 것이다. 유교경전 중에 역경은 고대인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담겨있다.
복희씨의 팔괘는 하도를 기초로 만들어 졌다. 이것은 최초의 문자였다. 형상을 본뜨는 방식을 취해 문자를 향해 발전하고 있었다. 하늘, 땅, 사람 등 주역의 괘는 우주 만물의 삼라만상을 형상화하여 문자화 한 것이었다. 주역의 팔괘는 결승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괘의 모양은 충분히 결승으로 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늘어뜨리면 양, 매듭을 묶으면 음으로 표시하고 이것을 세 개씩 매달면 팔괘가 되는 것이고 6개씩 매달면 64괘가 되어서 삼라만상을 모두 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주역의 괘상은 큰 테두리에서 고대 중국의 샤머니즘 시대에는 占이 생활화 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卜辭가 반영된 고대 생활상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주역이 현대에도 점술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상상력은 무한하게 퍼져나간다.
신농씨의 시대에 이르러 결승문자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그 일들을 통솔하였다. 여러 직업들이 매우 번잡해지며 결승문자들을 가식으로 꾸미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허신은 여기에서 신농씨의 결승문자를 언급하고 있다. 결승문자는 나무줄기나 새끼 등을 묶어서 매듭의 수·간격·모양·색 등이 각각 고유한 개념이나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 결승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몇 개의 결승으로는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직업들이 생겨나고 다스려야 할 일들도 불어나자 결승의 문자를 더욱 많이 만들어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미 신농씨 시대에는 결승의 방식이 복잡다단하게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농씨 시대의 결승문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안데스 문명의 결승문자인 퀴푸(quipu)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나의 긴 끈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48개의 제2의 끈을 묶어 늘어뜨리고, 제2의 끈에 다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된 제3의 끈을 매단 것이다. 끈을 매듭지어 단단위·10단위·100단위를 나타냈으며, 왕실용은 노끈의 색깔을 달리하여 공물·토지·생산물·의식 및 전쟁과 평화 등 다양한 국가 업무를 나타냈다. 퀴푸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보전되었으며, 판사, 사령관, 대가족의 수장 등과 같은 수도 쿠스코의 고위 관리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지휘관과 마을의 수령들도 퀴푸를 사용했다. 이와 비교해 본다면 신농씨의 결승도 다스림의 기본은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1]에서 보듯 결승은 다양한 형태로 복잡하게 발전되어 갔다. 이런 것들이 관청 앞에 걸리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새끼와 나뭇가지 등 다양한 도구들이 사용 되었고, 다양한 표기를 통하여, 卜辭, 판결, 집회, 등이 다양하게 공고 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수인씨의 결승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다만 결승에 대한 상상의 자료로서만 활용해 보는 것이다.
허신은 신농씨 시대에도 결승으로 백성을 다스렸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은 한국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학자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 당시의 샤머니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문자의 대한 설명도 황당한 것이 되고 만다. 한자는 많은 신화들을 함의하고 있다.
고려시대 가정 이곡은 “신이 듣건대, 태극이 나뉘어 兩儀가 되면서 天地의 이름이 있게 되었고, 사람이 그 사이에서 나와 三才를 이루면서 天皇ㆍ地皇ㆍ人皇의 칭호가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혼돈 상태에서 정교가 행해지지 않다가, 伏羲氏가 나와 書契를 만들어 結繩의 정사를 대신하였고, 神農氏가 나와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黃帝와 堯ㆍ舜이 그 뒤를 이어서 임금이 되었는데, 그런 뒤에야 衣裳을 늘어뜨린 가운데 천하가 제대로 다스려졌다고 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곡은 신농씨의 결승의 정사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복희씨가 서계를 만들어 결승의 정치를 대신하였다고 하여 결승문자는 서계가 만들어 지면서 오랜 기간 함께 사용되다가 서계 안으로 수용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어떤 의미를 매듭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부족 혹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발달되었다. 고대 중국의 결승이나 퀴푸 등이 대표적인 예로 전해지며, 그밖에도 티베트,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디언 등의 미개사회에서 결승문자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된다.
인간의 생활이 다양하게 전개됨에 따라 결승문자는 생활의 여러 일들을 모두 표현할 만큼 그 규모가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매듭의 형태도 다양하게 창안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으로 결승의 존재유무에 대해 밝혔다. 결승은 고대 사회에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증명하였다. 결승에서 서계로 바뀌면서 결승이 소멸되는 것도 동시에 보았다. 결승은 서계와 함께 일정동안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3. 결승의 기원과 발전(결승에서 서계로)
결승은 어떻게 발전되어 갔고, 또 어떻게 소멸되어 갔을까?
『易· 繫辭傳下』에서는 “上古時代에는 “상고에는 결승에서 시작하여 후세의 성인이 이것을 서계(書契, 刻記)로 바꾸었다. 백관이 이것으로 다스렸고 만민이 이것을 관찰하였다.”
書契란 선진시대의 『易·系辞传下』에 나온다. 서계는 결승에서 바뀐 것으로 백관은 이것으로써 정치를 하였고 백성들은 이것을 관찰하였다. 여기에서 서계가 문자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백성들은 이것을 관찰하였다고 했다. 서계란 결승처럼 일반 백성들이 알 수 있는 쉬운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결승에서 비롯된 서계가 정치에 사용되었고 백성들에게 인식되었다는 증거이다.
『易·系辞传下』에는 또, 결승을 만들고 팔괘를 만든 것은 모두 복희씨가 한 일이다. 비록 그러나 후세 성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복희씨의 일이라고 하였을 뿐이었다. 뒤에 공안국이 가탁한 『尚书序』 속에서 말한 옛날 복희씨가 천하의 왕 노릇할 때에 처음 팔괘를 그렸고, 서계를 만들어서 결승의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부터 문적이 생겨났다. 결승의 설에 대해 만든 것은 복희씨 이전의 일이다. 다만 그대로 여기더라도 서계의 발명이 결승보다 늦게 된 것이다. 게다가 결승의 사용을 대체한 것이다.
許愼은 「說文解字 敍」에서 “황제의 사관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분산되어 있는 무늬의 이치가 서로 구별되어질 수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書契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허신은 설문해자 서문에서 문자 이전의 단계인 서계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가공의 인물인 黃帝의 史官 蒼頡이 새와 짐승들의 발자국을 보고 창안하였다는 것은 곧 漢字가 아니라 書契였다. 書契는 무엇일까?
위의 두설을 비교해서 합쳐보면 상고시대는 결승을 가지고서 나라를 다스렸고, 후세의 성인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허신은 창힐이 처음 書契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 서계를 만든 후세의 성인은 누구인가?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결승을 서계로 바꾼 사람은 蒼頡이어야 한다. 어찌되었건, 書契는 結繩에서 문자로 변환한 부호이다. 새와 짐승의 발자국들이 서로 어지럽게 섞여있어도 어떤 짐승의 발자국인지 서로 구별될 수 있다는 논리에서 창안하여 서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한자의 시대로 진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서계는 필획이 간단하였고 결승문자의 다양한 매듭에서 발전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결승이란, 문자가 없던 태고 시대에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부호를 삼아서 행했던 소박한 정치 형태였다. 神農氏가 이 결승의 정사를 행하다가, 伏羲氏 때에 이르러 팔괘를 긋고 나무에 새긴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서 書契의 정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易·系辞传下』와 『史記, 五帝本紀』에 보인다. 書契는 결승에서 발전한 부호 문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문구이다. 한자는 결승에서 서계로 발전되고, 거기서 다시 문자로 발전하여 정착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러면 서계란 어떤 모양의 문자이고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고대 문자 연구에서 書契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 보인다.
결승에서 발전한 서계는 도대체 어떤 형태일까? 중국 바이두 사전에서 찾은 서계의 형태는 다음과 같았다.
중국 淸末·民國初의 저명한 고대문자학자인 羅振玉(1866~1940)은 殷墟出土의 甲骨文字를 연구 하여, 전·후·속 3편의 〈殷墟書契〉를 근대적인 인쇄로 간행된 최초의 갑골 문자 錄集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해설서인 〈殷墟書契考釋〉 등을 펴내어, 그 해독을 시도하였다. 다음은 나진옥이 편집한 『은허서계』에 실려 있는 서계의 모습이다.
이 책을 통해보면 중국 안양의 고대 은허 출토에서 발견된 [그림1]의 서계가 나진옥의 책에 도록으로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진옥은 이것을 결승에서 발전한 서계로 보고 있다. 郭沫若은 1972년 그의 문자학 논문 「古代文字之辨證的發展」에서 중국의 한자는 서안 半坡유적의 刻畵 符號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刘大白은 1933年 《文字学概论》에서 “먼저 기호가 있었고 뒤에 도화가 있었다. 문자의 발생은 기호와 도화 두 가지 근원설을 주장했다.
唐蘭은 《古文學導論》 속에서 “文字的起源是圖畫”라고 하였다. 그는 《中國文字學》에서 “最初의 文字는 書契라 하였고,書는 도화에서 유래하였고, 契는 記號에서 유래하였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周有光은、“文字는 圖畫에서 기원하였으며, 圖畫文字 이것은 文字의 先驅이다”라고 하였다.
鲁迅이나 郭沫若 같은 학자는 문자는 고대 노동인민들이 창조한 것으로 한사람이 어느 한 시기에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것은 결승의 생성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가 결승을 기호화 하여 문자로 바꾸었는가?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창힐이 결승을 대신하여 서계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것은 기호화된 문자였다.
그렇다면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설은 잘못된 것인가? 아무리 신화적인 미봉책이라고 하지만 중국 문자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창힐을 빼버리면 이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다. 한자의 기원은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가 충돌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국 5천년 역사를 뛰어넘는 시대의 것으로 판명된 반파의 유적이나, 앙소의 유적의 출토 물에서 나온 각화문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한자는 언제 무엇에서 기원한 것일까?
이것은 이때까지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갑골문자 보다도 훨씬 이전의 것이다. 곽말약은 이것을 刻畫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중국문자의 기원이라고 하였다.
이 刻畫의 모습이 [그림5]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창힐이 결승을 새의 발자국을 보고 서계로 만들었다는 蒼頡造字說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중국의 전통적 문자 창조설은 신화적 미봉책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중국 역사상 최초로 나타나는 문자로서 중국 한자의 기원은 이것이라는 설이 유력해 보인다.
서안의 半坡유적은 붉은 바탕에 검은 무늬의 彩陶를 그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시대 仰韶 문화의 전형이다. 그 후대의 龍山문화는 얇은 바탕의 단단한 黑陶를 그 특징으로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半坡 채도에는 그 하나하나마다 陶器상의 무늬와는 전혀 다르면서 문자와 유사한 간단한 刻劃들이 있다는 것이다[그림5].
黑陶에도 이러한 각획이 있지만 그 수량은 많지 않다. 이 각획은 모양이나 형태로 보아서 결승으로도 충분이 표현이 가능한 것들이다. 이것은 결승에서 유래한 서계일 가능성이 높다. 나진옥이 편찬한 〈殷墟書契〉의 도편들을 보면 초기 서계인 이것에서 유래하여 발전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 보인다. 이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중국 안양에서 발굴된 은허서계와 그 모양이 유사하다. 또한 결승문자가 서계로 변한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것은 결승을 묘사한 각획일 수가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일련의 학자들은 刻畫라고 했을까? 중국의 전통 문자의 기원설인 창힐의 조자설을 부정하려고 하니 書契란 용어를 쓰기에는 부적절한 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련의 학자들이 刻畫 符號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것 또한 부적절한 용어이다. 이것은 書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의 후대 기물에는, 陶器이건, 銅器이건 혹은 다른 제품이건 간에 기물에 장인의 이름을 새기는 物勒工名의 전통이 있었다. 특히 殷代 청동기상의 족휘를 표시하는 몇몇 각화문자는 이들 부호와도 매우 유사하다[그림6].
곽말약이 주장하는 刻劃은 書契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것이 만약 서계와 일치한다면 중국의 한자의 기원은 6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곽말약은 한자의 기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刻畫가 한자의 기원이 되며, 결승에서 서계로 나아갔다는 중국 전통의 문자학 이론은 난관에 부딪친다. 비록 신화적인 미봉책으로 문자의 기원을 설명한 것이지만 중국의 고대 문헌을 긍정한다면 이것은 서계가 맞다.
이렇게 되면 삼황오제와 삼분오전의 역사와 창힐의 문자창조설이 모두 역사적으로 순조롭게 설명될 수도 있어 보인다. 신화는 역사과학의 발달로 점점 더 역사로 전환된다. 이것이 만약 결승에서 유래한 서계라면 중국 문자사의 많은 의문이 풀린다. 갑골문 이전의 요순시대 문자나 하나라 때 문자가 있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 바뀐다. 신화 속의 인물들은 실재 역사 속에 있었던 인물들로 설명된다. 이 문자의 파편들이 발견되면서 한자의 기원은 신화적 영역에서 역사적 영역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대부분 문자의 기원에 대한 시각은 대부 여기로 쏠리고 있다.
허신이 설문해자 서문에서 말한 창힐이 결승문자에서 서계를 만들었다는 설도 고증이 된다. 따라서 중국 한자의 기원은 결승문자에서 서계로 발달되어 갔다는 이론이 정립되는 샘이다.
이 당시 발견된 채도의 나타난 刻畫 그림을 살펴보면 정교하면서도 簡易化되어 있으며, 뜻을 전달하기 위한 그림으로 문자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그림7]
이들 들은 서계들과 함께 사용되어 문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이들 그림에서 상형문자들로 발달되어 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자의 기원이 바로 이들 刻畫라는 설은 힘을 얻는다. 이런 그림문자는 서계와 함께 사용되어 의사를 전달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을 것이다.
한자의 기원이 6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시기는 중국의 역사상 신화시대이다. 중국 역사의 범위를 넘어서 문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창힐과 중국고대 신화적 인물들을 부정한다면 중국의 문자학 연구는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문자의 발달과정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수많은 한자의 발달 과정은 모두 허위가 되고 만다.
곽말약은 이 刻劃 부호는 틀림없는 한자의 원시단계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곽말약은 한자는 이 刻畵 符號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刻畫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이 刻畵들을 나진옥의 『殷墟書契』의 圖錄에 비추어 보면 유사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청말 민국초의 문자학연구자 나진옥은 이것을 각화로 보지 않고 서계로 보고 있다.
이 각화에서 서계의 전형을 유추할 수 있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결승의 모형을 유추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5]를 보면 그 유형이 結繩에서 유래한 書契가 맞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저명한 고문자학자 唐蘭도 “最初의 文字는 书契라고 하였다.
창힐이 처음 글자를 만들 때 대체로 물상의 종류에 의거하여 모양을 본떴기 때문에 이를 文이라 하고, 그 뒤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합해지자 이를 곧 字라 한다. 문이란 사물의 본래 모습이고, 자란 말이 파생되어 차츰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자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이 설을 근거로 일반 사람들은 대개 한자를 만든 사람은 황제의 사관 창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힐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이 다른 짐승 것들과 섞여 있어도 새의 발자국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창힐은 새의 발자국에서 착안하여 그때까지 통용되고 있었던 결승을 서계로 대신했다. 서계 속에는 다양한 결승문자들이 앙금처럼 녹아서 그 옛날의 문자였음을 흐릿하게나마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진다. 이것이 새겨 진 것을 刻劃이라 한다. [그림5]에서 보듯 그림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결승에서 유래한 듯한 모양이 유추될 수 있다. 이것은 창힐이 만들었다는 서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록 신화적인 미봉책으로 서술되긴 했지만 결승에서 서계로 나아갔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것이 만약 서계가 맞는다면 역으로 고대의 결승문자를 유추할 수가 있다. 이러한 각획부호는 틀림없이 중국의 가장 이른 문자이거나 그 잔유물이다. 이렇게 보면 각획은 결승에서 유래한 서계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울주군의 암각화를 비롯한 다양한 그림문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중국과 비슷한 각화들도 발견된다. 그렇다고 일각에서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으며, 그 동이가 우리나라라는 설을 주장하는 것은 황당한 주장이며 문제가 많아 보인다. 한국도 고대부족국가형태로서 존재한 나라들이 많았다. 다만 우리나라에도 결승은 있었고 각화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로 발전시키지는 단계까진 가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중국의 문자가 통일되고 발전되어 오늘의 한자 모양을 갖춘 것은 유래가 있고 증명이 되는 사실이다.
결승문자의 파편들을 초기 서계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고, 6000여년 전의 앙소문화 반파유적의 刻畫에서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결승의 문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서계로 발달되어 그 형상을 유추할 수 있고, 6000여 년 전의 각화에서도 결승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승문자는 한자의 기원으로 활용되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한자는 다양한 샤머니즘과 신화의 요소를 머금고 있다. 한자 속에는 중국 고대의 다양한 신화와 전설, 설화 들이 문자의 파편으로 남아서 그 빛을 오묘하게 발하고 있다.
4. 결론
이상으로 중국 고대의 결승문자에 대해 문헌을 바탕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펼쳐보았다. 최초의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중국 최초의 문자는 어떤 형태였을까? 황제시대 사관인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설은 약 5000년 까지 내려갔지만, 半坡遺址、大汶口黑陶등지에서 발견된 刻畫符號들을 역사과학적인 방법으로 조사한 문자의 역사는 6000년, 혹은 8000년 까지 내려간다. 창힐 보다 3000년이 더 오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삼천년간의 한자역사를 잃어버렸다. 무어라고 설명해 내어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한자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대부분 황제시대의 사관이었던 창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설을 긍정적으로 채택 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문자의 기원을 교육하며 결승을 언급하여야 한다.
중국의 많은 문헌에서는 한자가 결승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들어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한자의 기원을 서술할 때 結繩을 피해서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결승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지금까지 연구된 적이 없는 것 같다.
한자의 기원을 결승에서 찾지 않고 최근에 발굴된 각화에서 한자의 기원을 찾는 연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刻畫符號에 대한 설명은 중국 전통의 문자의 기원인 창힐의 문자 창제설을 부정하게 된다. 이 刻畫符號들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이 刻畫符號도 신화시대의 유물이다. 따라서 고대의 샤머니즘 문화가 함의되어 있을 수 있다.
1899년 중국 안양에서 갑골문자가 발견되면서, 문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이해 되어오던 창힐의 한자 창제설을 부정하고 있다. 갑골문자에도 고대 신화적 요소가 함의되어 있다. 창힐의 존재를 막연하게 부정할 수만 없는 처지이다. 中國의 문자사를 신화적 미봉책으로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가?
황제의 사관이었던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결승을 문자로 바꾼 서계였다. 결승문자는 중국 고대 정치에 활용될 만큼 발달했던 문자 체계이다. 결승은 그 종류도 부지기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승은 언제 생성되어서 어떻게 발전하다가 어떻게 소멸된 것인가? 결승은 다양한 상상력과 창조의 정신을 거쳐서 결승문자로 발달하여 전성기를 거쳤다. 그러나 결승은 서계 속으로 수용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 書契는 지금 사라진 것일까?
상고시대 아득한 옛날부터 사용 되던 결승문자는 그 형태상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주역의 괘상과 융합될 수 있었다. 주역의 卦象은 한자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 고대 문자사에 書契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다. 半坡유적과 仰紹문화의 도기에서 발견된 書刻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서계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논문은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끝을 맺어야 한다. 半坡유적에 나타난 문자의 파편들은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한자의 기원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것이 서계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기 위하여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여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중국 고대 문헌을 통해서 보면 “결승은 서계를 태동하였으며, 서계는 결승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앞으로 한자의 기원이 결승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고증해 내고 결승에서 만들어진 서계를 바탕으로 결승문자에 대한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상상력이 되리라고 판단한다.
半坡유적이나 仰紹유적의 각화부호들이 서계라는 것만 증명된다면 우리는 결승의 전형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자 속에는 중국 고대의 다양한 문화가 함의되어 있고, 신화와 전설, 설화 들이 문자의 파편으로 남아있다. 한자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인 요소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한자는 고대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버린다면 한자는 모두 온전하게 설명될 수가 없다.
이 논문이 중국 고대 결승문자에 대한 暗鬱한 연구의 불을 밝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며 한자의 기원에 대한 교육과 연구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周易』
『老子』
『左傳』
許愼, 『說文解字』
葛洪, 『抱樸子.鈞世』
李穀, 『稼亭集』
羅振玉, 『殷墟書契』
郭沫若, 「古代文字之辨證的發展」(?考古? 1972年 第3期)
刘大白, 『文字学概论』, 上海:上海大江书铺,1933.
唐兰, 『古文字学导论』(增订本), 济南:齐鲁书社, 1981.
중국 인터넷 바이두 사전.
<Abstract>
A study on the quipu(結繩) from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s.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quipu(結繩) in Ancient China. This paper on ancient Chinese as part of the quipu(結繩) education and research about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 study of a paper.
Cangjie(蒼頡) in the literature every 5,000 years of Chinese history is written that he created a character. And referring to the quipu.
Cangjie Seogye(書契) recorded setting in the quipu.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s must be found in the quipu.
The quipu meal or tree roots of character by saying a knot that tie record the facts before the invention was a kind of way.
The quipu text to the good old days when there are no nations and for all ages used in a way of communication from the first code and formed character is based on this. The instrument was to be.
In ancient times, he reigned in the quipu of the record of China. If so, characters are a lot of quipus.
Most scholars consider China's first letter to be found in the sang(商) alphabet, which was discovered in 1899. But there may be a problem. It is assumed that the gapkkol(甲骨) alphabet has already been formed by many characters and has been completed by the completion of the finished phase and through the previous phase of the gapkkol alphabet. So, what is the origin of the gapkkol alphabet?
]The evidence for this comes from rock and cave characters and paintings. There are various character remains that are believed to have been developed in the quipu of the ancient monuments, including the Chinese. This turned out to be 6,000 years ago in the Carbon Test results. A series of Chinese researchers tend to see this I as the origin of Chinese characters. This is far beyond the scope of the description of the Chinese history described in the past.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 was developed in the quipu of the quipu, and it is likely to develop into Chinese characters by advancing to various developing countries. The various characters in the quipus are similar to those of seogye. The quipu have won the seogye, and the seogye have won the quipu text. The quipu decision was judged to have reached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s and concluded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s.
Key words: <quipu(結繩)>, <Cangjie(蒼頡)>, <Seogye(書契)>, <gapkkol(甲骨) alphabet>,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s.>.
2016.1, 대만 까오슝 사범대학, 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http://file:///C:/Users/user/Desktop/ilovehankuk-1-1/15684169/156841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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