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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화콘텐츠 연구소

퇴재 신우 묘표, 우복 정경세

고려(高麗) 안렴사(按廉使) 퇴재(退齋) 신우(申祐)공의 묘표를 쓰다

 

우복 정경세

 

상주목(尙州牧) 관할의 의성군 단밀현(丹密縣) 주선리 관동마을 앞에 자그마한 돌비석 하나가 길 왼편에 서 있는데, 거기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마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공이 살던 마을이라고 하며,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은 경례(敬禮)를 하고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신우(申祐)이고,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다. 일찍이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었는데, 고려조의 고사(故事)에 때때로 근시(近侍)의 관원을 여러 도로 내려 보내어 산천(山川)에 제사 지내고 백성들의 풍속을 탐문하고 수령들의 근만(勤慢)을 살펴 출척(黜陟)하였다. 그것을 이름하여 안렴사라고 하였는데, 대개 한때의 극선(極選)이었다.

 

공은 혼탁한 세상에 처하여서도 능히 깨끗함으로 몸가짐을 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인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신윤유(申允濡)가 졸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였는데, 대나무 두 그루가 묘 앞에 자라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한 소치라고들 하였는데 조정에 알려져 정문(旌門)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마을의 이름을 효자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사실은 국승(國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이름이 신광부(申光富)와 신광귀(申光貴)이다신광부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이름이 신사렴(申士廉)과 신사빈(申士贇)이며신사렴은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그의 현손인 신원록(申元祿)이 뒤에 또 효행으로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뒤이어 정려(旌閭)되었다공의 8세손으로 지금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있는 신달도(申達道)씨는 나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벗이다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몇 백 년이 지나서 의관(衣冠)을 파묻은 곳이 살고 있는 데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인 의성군 구천면 사포(蛇浦)의 태향(兌向언덕에 있는데묘도(墓道)에 묘표가 없고 자손들이 또 먼 곳에 흩어져 살아 묘역을 살펴보는 것조차 제때에 할 수가 없다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드디어 민몰되어 나무하고 꼴 베는 사람들이 묘위에 올라가게 될 경우비록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그곳을 알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더구나 탁월한 선조의 행적이 장차 민몰되어 전해지지 않게 된다면이 어찌 슬프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족형(族兄)인 승지(承旨신지제(申之悌)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이미 나와 여러 동종(同宗)들과 더불어 비석으로 쓸 돌을 뜨고 빗돌받침을 마련해 놓았으나미처 세우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이제 공이 해 주는 한 마디 말을 얻어 비석에 새기고자 한다그리하여 선조의 덕이 후세에 드러나게 해 준다면그 은혜가 아주 클 것이다이에 감히 절을 하고 청하는 바이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안렴공(按廉公)의 효성은 이미 귀신을 감동시키고 천지에 퍼져서 혁혁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으니어찌 거칠고 졸렬한 나의 글이 있어야만 전해지겠는가돌아보건대 나는 상주고을의 말학(末學)이고 공에게는 외예(外裔)가 된다그러니 의리에 있어서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다이에 드디어 가장을 상고해 보고 위와 같이 서술한다조정에 서서 역임한 관직의 차서 및 집안에서 거처할 적의 행의(行誼)에 대해서는 연대가 이미 멀어서 문적(文籍)을 상고해 증험할 수가 없기에 상세하게 쓰지 못한다그 후손들은 아주 많아서 역시 다 기록할 수가 없기에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현재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는신달도(申達道문학군(文學君)이 있고그의 형인 신적도(申適道)는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으로 있고동생인 신열도(申悅道)는 예조좌랑으로 있다이른바 족형인 승지는 이름이 신지제(申之悌)문명이 있어 대과(大科)에 급제해 사류(士類)들이 추중하는 바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그의 아들은 이름이 신홍망(申弘望)이다신달도(申達道문학군의 아들 이름은 신점(申坫)과 신구(申坵)인데모두 준수하고 온아하다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적지 않을 것이니아주신씨(鵝洲申氏)의 복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길이 너에게 아름다움을 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하였고또 이르기를, “군자는 만년토록 영원히 자손과 복을 주리라.君子萬年 永錫祚胤” 하였으니공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겠는가아름답도다.

 

아주신씨는 평산신씨에서 분파된 성씨이다. 시조 신익휴 때부터 고려의 수도 개성을 근거지로 생활 했다. 개성 삼지리 그곳이 아주신씨의 터전이다. 물론 고려시대에 성씨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지면서 유추한 것이다. 퇴재 신우는 전라도 안렴사를 지냈다. 태조 이성계와는 친구지간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거부했다. 나는 고려조의 신하이다. 충신불사이군을 외치며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후에 개성생활을 마감하고 길재와 함께 영남으로 내려 왔다. 아주신씨는 군공으로 아주를 봉받은 것이지 거제도에 고려때부터 직접 산 것은 아니다. 시조 신익휴는 거제도를 정벌하여 군공을 세우고 거제도 아주현을 하사받고, 아주군에 봉해졌다.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 아주군 신익휴가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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