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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화콘텐츠 연구소

조선의 성리학은 병폐요인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이었다.

조선성종 때부터 대두되기 시작하던 훈구대신들과 신흥 사림들의 대립은 연산군과 중종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신흥 사림들의 득세로 이어졌다. 고려말기에 안향으로부터 주자학이 전래된 이래로 꾸준히 발전되어오던 성리학은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사상의 국면을 맞는다. 이른바 사화로 불리는 한바탕 정쟁은 성리학을 조선 도학의 새로운 이념으로 고착화 시키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동네를 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 어느 것 하나 성리학적 형상사유를 벗어나서 일상이 존재하기란 쉽지 않았다. 사림파의 득세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간에 역동적인 성리정신의 탄생은 개혁과 창조의 충동을 모든 면에서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상승의 분위기는 민족문화의 변화를 요구하고 방향을 정해주었으며, 하나의 새로운 사조를 탄생하게 했다.

  도남 조윤제 선생은 조선 중종에서 선조 임진년에 이르는 약 90년간을 두고 이 시대의 작가 중에는 사화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벗어나 자연의 진경에 몰입하여 강호의 경치에 묻혀 지내려는 새로운 작가 군이 일어나고 있어 이 시대를 자연미의 발견시대라고 한 적이 있다. 또  퇴계는 이 시기 조광조의 스승이었던 한훤당 김굉필을 조선 도학(성리학)의 조종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중국 남송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주자학은 중국에서는 외면을 당했지만 이 시기에 와서 조선에서 꽃피우게 되었다. 여기에서 일어난 예술적인 장르들은 성리의 미의식을 함의하여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거대한 주자정신의 실체 속에서 변화의 목소리를 높이어 놓은 세계사에 보기 드문 철학적 인식 전환은 조선중기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확산되어 갔다. 조선의 모든 예술 테마들이 민족적인 것과 함께 성리미학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사대부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련의 시가 예술은 성리의 미의식을 태동시켰으며 이 이후 조선후기까지 성리미학은 우리문학사에 큰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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