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표작

국민일보, 기사.

선비, 왕을 꾸짖다/신두환/달과소


“사냥을 중지하시고 정사를 돌보십시오. 옛날 임금은 하루 사이에도 만 가지의 일을 보살피되 깊이 생각하고 멀리 걱정하였으며, 그 좌우에는 올바른 선비를 두고서 정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놀이에 미친 사람이나 아니면 사냥꾼과 더불어 매나 개를 풀어놓고 꿩이나 토끼를 쫓으며 산과 들을 달리면서 스스로 그칠 줄을 모르시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신라 진평왕 때 인물 김후직이 올린 상소다. 김후직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기록이 정확하지 않지만, 진평왕 2년(580)에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국사는 뒷전인 채 한낱 소일거리에 몰입해있는 왕의 무절제함을 지적하는 붓끝이 글자 그대로 서릿발 같다. 민주주의 이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도 관료가 국가지도자를 이렇듯 통렬하게 비판한다는 건 옷 벗을 각오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봉건질서가 철저하게 뿌리내린 왕조시대에랴.

그러나 실제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료가 서슬 퍼런 정의감과 강직함으로 벼슬을 내놓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으면서 주군에게 직언을 올렸다. 그 수단은 대개 상소(上疏)였다. 말보다 글을 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최대한 정치한 논리를 전개하려는 이유가 컸다. 이황(1501∼1570)의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 나오는 "직접 구두로 진술해 올리면 본래 정신이 흐리고 구변이 무딘지라 한 가지를 아뢰면서 만 가지를 빠뜨릴 우려가 있으므로"라는 말에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신두환 안동대 한문학과 교수가 펴낸 '선비-왕을 꾸짖다'는 동문선에 실린 최초의 상소로서 후대에 충성스러운 직간의 모범이 된 김후직의 '상진평왕서(上眞平王書)를 필두로 역사상 유명하고 중요한 상소들을 골라 해설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거적을 메고 도끼를 든 채 대궐로 들어가 충선왕의 패륜을 지적했던 우탁(1263∼1342)의 '지부상소(持斧上疏)', 실권을 휘두르고 있던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로 칭하고 명종을 고아에 비유해 매섭게 일갈하면서 단성현감 자리에서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힌 조식(1501∼1572)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선조가 도량이 넓지 못하고 공부가 부족해 문제라는 이이(1536∼1584)의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이 선비들의 놀라운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신하된 도리로 바른말 하는 게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상소는 한 선비의 사회적 위상과 목숨을 송두리째 걸어야 할 수도 있는 비장한 결단의 표출이어서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이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상소로 패가망신한 사례는 조선 역사에 부지기수다.

광해군 때 부사직 정온은 영창대군이 피살된 데 대해 "영창은 죄가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됐다. 영의정을 지낸 완평부원군 이원익과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비불가론을 광해군에게 올렸다가 삭탈관직 됐다. 고산 윤선도는 현종 시절 이른바 '예송논쟁' 와중에 우암 송시열을 맹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유배됐다. 송시열은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한 것은 잘못이라고 숙종에게 고언 했다가 결국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상소문을 사라진 왕조시대의 글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예리한 현실인식과 문장력, 진정성이 살아있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더욱 절실한 정론직필일지 모른다. 군왕이 갖춰야 할 덕목과 몸가짐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 이황의 '무진육조소' 한 대목을 지금 다시 음미해 본다.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바른 사람을 질시하고 남을 기피하여 틈만 나면 일을 저지르는 자는 단연코 미리 눌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을 멀리하고 서로 배척하게 되면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보수적이고 상리(常理)만을 지키는 신하에게만 의지하면 새로 분발하고 진작하여 잘 다스리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며, 반대로 지나치게 진취적이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는 자에게 일을 맡기면 잘못하다가는 기존질서가 문란해질 것입니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http://file:///C:/Users/user/Desktop/ilovehankuk-1-1/15684148/15684148-%EA%B5%AD%EB%AF%BC%EC%9D%BC%EB%B3%B4,-%EA%B8%B0%EC%82%AC.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