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신씨는 시조가 신익휴이다. 고려 때 거제도를 정벌하여 고려에 복속시킨 공의로 아주군을 봉받았으며, 이 분이 곧 아주 신씨의 시조이다.
인재공 신채는 아주신씨 중에 뛰어난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진사시]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0위(40/100) |
[상세내용]
본관은 아주(鵝洲)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이다.
부친 행 상운도찰방(行祥雲道察訪) 신적도(申適道)와 모친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신연(申埏)‧신탄(申坦)이고, 동생은 신점(申坫)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홍여하(洪汝河) 등과 학문적인 도움을 주고 받으며 도의(道義)로써 교유하였다.
광해군 재위 중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인조가 등극한 뒤인 1646년(인조 24) 식년시에 진사 3등 10위로 합격하였다.
시문집으로 신상하(申相夏)가 편집‧간행한 4권의 『인재집(忍齋集)』이 전하며, 문집 중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대학(大學)』을 탐구하여 문답 형식으로 집필한 「답대학문목(答大學問目)」, 『중용(中庸)』‧『대학』의 관계를 연구한 「용학표리설(庸學表裏說)」,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자세하게 설명한 글로 「성학십도명(聖學十圖銘)」 등이 있다.
성균관 진사 신공 묘갈명 병서〔成均進士申公墓碣銘 幷序〕
공은 휘가 채(埰)이고 자가 자경(子卿)이며, 호는 인재(忍齋)이다. 선대에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 신윤유(申允濡)와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 부자가 잇달아 고려조에 현달하였다.
안렴공(按廉公)이 부친상에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쌍죽(雙竹)이 솟아나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6대를 내려와 호부 우시랑에 증직된 신원록(申元祿)에 이르러 역시 지극한 효성으로 소문났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고 신흘(申仡)은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선고 신적도(申適道)는 상운도 찰방(祥雲道察訪)을 지냈는데 천품이 매우 고고하여 관직을 버리고 한가로이 수양하였다. 선비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경술년(1610, 광해군2) 6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단정하였으며 뜻을 독실하게 가져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문예가 탁월하고 일찍 성취되어 인재(訒齋) 최현(崔晛) 공이 일찍이 함께 경사(經史)를 강론하다가 감탄하며 “경을 전문(專門)하는 이름난 학자도 미치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몸가짐이 엄숙하여 동료들이 공경하고 감복하였다. 성균관에서 거벽(巨擘)을 꼽을 때면 영남의 세 아무개라고 칭하였으니, 대개 같은 시기에 두 명의 이씨(李氏)가 있어 공과 이름이 같았는데 문장과 행실을 앞다투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육행(六行)으로 관유(館儒)를 선발할 적에 공이 으뜸이 되어 화려한 명성이 더욱 빛났는데도 공은 오히려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겼다. 경자년(1660, 현종1)과 계묘년(1663)에 거듭 양친의 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몸을 손상함이 예제(禮制)보다 지나쳤다. 복을 마친 뒤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고 조용히 정양하여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서사(書史)에 빠져 지내며 느긋하게 여생을 마치려는 뜻을 지녔다. 관찰사가 집에 찾아와 경의를 표하였고 경재(卿宰)들이 대부분 그가 세상에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임자년(1672) 9월 8일에 졸하니 향년 63세였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호양 처사(湖陽處士) 권익창(權益昌)의 따님이다. 유순하고 정숙한 덕이 있어 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였는데, 공보다 두 달 먼저 졸하였으니 실로 같은 해 7월 3일이었다. 현의 북쪽 계란치(雞卵峙)에 합장하였다가 후에 팔지산(八智山) 병향(丙向)의 언덕에 개장하였다. 2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우석(禹錫), 문석(文錫)은 모두 그 문장과 행실을 이었으며, 두 딸은 금문조(琴文操), 박문흥(朴文興)에게 시집갔다. 우석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덕윤(德潤)은 의모(義模)를 후사로 삼았다. 차남 덕해(德海)는 아들 의모, 기모(器模), 예모(禮模)가 있다. 막내 덕위(德湋)는
아들 익모(益模), 분모(賁模)가 있다. 두 딸은 권득태(權得泰), 송후(宋煦)에게 시집갔다. 문석은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덕일(德溢)은 아들 언모(彦模), 정모(正模)를 두었는데, 정모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차남 덕호(德浩)는 예모를 후사로 삼았다. 삼남 덕순(德洵)은 정모를 후사로 삼았다. 세 딸은 이영중(李英中), 권성(權惺), 이후겸(李厚謙)에게 시집갔다. 현손 이하로 또 몇 명이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묘도에 비석이 없었으므로 여러 후손들이 빗돌을 마련하여 글을 새겨서 후세에 분명히 보여 주고자 하여 나에게 부탁해 명을 지은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주 신씨 집안 대대로 鵝洲之世
지극한 효도로 이름났지 以孝著聞
하늘이 큰 복을 내려 줘 天篤降祜
자손들이 많고 훌륭하네 子孫振振
공에게 그 미덕이 모여 公鍾厥美
재능을 풍부히 갖추었네 富有才性
영남의 삼걸로 칭해지고 嶺稱三某
성균관 육행에 천거되었지 館薦六行
부모 잃은 비통함으로 悲纏蓼莪
과거 공부 그만두고 跡謝公車
대와 매화 마주하며 晤語梅竹
책 속에 파묻혀 지냈네 酣飫圖書
여유로운 은자의 생활 婆娑隱約
바꾸지 않으리 맹세했네 永矢無改
향리엔 백 년이 흘러도 鄕里百年
유풍이 사라지지 않았네 遺風未沬
팔지산의 언덕에 八智之原
네 척의 봉분이라 四尺有崇
내 빗돌에 명을 새겨 我銘斯石
이로써 무궁히 고하리 用詔無竆
公諱埰。字子卿。號忍齋。上世有版圖判書允濡,按廉使祐。仍父子顯於麗朝。按廉公父喪廬墓。有雙竹異感。六世至贈戶部右侍郞元祿。亦以至孝聞。是爲公曾祖。祖仡。贈左承旨。考適道。祥雲道察訪。天分甚高。棄官閒養。妣坡平尹氏。庚戌六月十四日生公。幼聰穎端嚴。篤志好學。文藝卓然早成。訒齋崔公晛嘗與講論經史。歎曰。專門名家所不逮也。丙戌。中司馬遊泮宮。嚴毅自持。儕流敬服。館中數巨擘稱嶺南三某。蓋同時有二李。公與同諱。文行相次云。朝廷以六行選館儒。以公爲首。華問益彰。公猶欿然自視。人以此多之。庚子癸卯。荐遭內外艱。哀毁逾禮。制旣闋。不復應擧。閉門恬養。種植梅竹。涵淹圖史。悠然有終老之志。州伯造門致敬。卿宰多惜其不見用於世也。壬子九月八日卒。享年六十三。配安東權氏。湖陽處士益昌之女。柔婉貞淑。甚有婦道。先公兩月卒。實七月三日。合窆于縣北雞卵峙。後改卜于八智山丙向原。有二男三女。男禹錫,文錫。皆世其文行。二女。適琴文操,朴文興。禹錫三男二女。男長德潤以義模後。次德海。有子義模,器模,禮模。季德湋有子益模,賁模。二女。適權得泰,宋煦。文錫三男三女。男長德溢。有子彥模,正模文科。次德浩。以禮模後。季德洵。以正模後。三女。李英中,權惺,李厚謙。玄孫以下又若干人。公沒且百有餘年。而墓道闕顯刻。諸孫等將伐石鑱辭。以昭示來世。屬象靖而銘之。銘曰。
鵝洲之世。以孝著聞。天篤降祜。子孫振振。公鍾厥美。富有才性。嶺稱三某。館薦六行。悲纏蓼莪。跡謝公車。晤語梅竹。酣飫圖書。婆娑隱約。永矢無改。鄕里百年。遺風未沬。八智之原。四尺有崇。我銘斯石。用詔無竆。
<출전 대산집,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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