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론의 역할과 사명
신두환 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당나라 때 유명한 문장가인 한유는 『送孟東野序』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저 만물은 그 공평함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내어 울리는 것이다. 초목에 원래 소리가 없는 것을 바람이 흔들어 대면 소리를 내며, 물에 소리가 없는 것을 바람이 움직여 소리를 낸다. 물이 뛰는 것은 이를 격동하게 하는 것이 있음이요, 물이 달리는 것은 이를 막음이 있음이요, 물이 끓어오르는 것은 이를 뜨겁게 달구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 사람이 말하는데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 공평하지 못한 일이 있은 후에야 말을 하는 것이다.”
고대시대에도 세상이 불공평하자 그 울어대던 것이 그 시문을 통해서 드러나고 임금이 불공평하면 상소가 빗발치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울어댔다. 그 중을 잃으면 불공평으로 이어지고 불공평하면 우는 것은 만대의 바른 이치이다. 모든 문학이 모든 역사가 각종장르의 글들이 바로 이 불공평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인가 불평한 것이 있어서 우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사에 있어서도 매한가지다.
최근 대한민국이 미국산 소고기 전면 수입개방이란 소식이 전해지면서 불공평거리가 있자, 대한민국 방송이 그곳을 향해 울렸고, 대한민국 국민이 따라서 소리를 내어 울렸고 일부는 촛불로서 소리를 내어 세계를 울렸다. 또 인사가 불공평하자 국민들이 또 울어댔고 호남의 인사가 소외되자 호남이 울었고, 영남의 인사가 역차별 당하자 영남이 울었다. 그러자 충청 강원 제주까지 울지 않는 곳이 없다. 촛불 시위대가 너무 지나쳐 그 공평함을 잃으니까? 또 다른 국민들이 이를 울리고 방송이 그 공평함을 잃자 이번에는 국민들이 방송을 향해 울렸다. 대한민국은 크고 작은 불공평 때문에 시끌벅적하다. 시인은 시로서 불공평을 말하고 소설가는 소설로서 불공평을 말한다. 대저 만물은 그 공평함을 잃으면 우는 것이 지극히 맞았다.
그 소리를 내어 울리는 것의 중심에는 언론이 있다. 이 시대는 언론을 빌어 대표로 울리도록 했다.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가? 언론의 사명과 역할은 공정하고 객관성 있게 잘 울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미국산 소고기, 광우병, 촛불시위에 대해 방송이 공평성을 잃자 국민들이 언론을 향해 울어대기 시작했다. 언론이 한 번 잘못 울리면 온 국민이 그 불공평을 들어 줄줄이 울어댄다. 그러나 울어야할 방송이 너무 적다. 우리나라에는 서너 개 밖에 안 되는 텔레비전 방송이 울 권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어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이로 인해 편파보도의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만 하는 한정된 미디어 공간은 언론을 극도로 권력화 하고 있다. 이렇게 간다면 모르긴 해도 국민들의 답답증은 점점 더 심해가고 언론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깊어만 갈 것이다. 언론은 무소불위의 선전과 선동 권리를 앞세워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고 정치는 이를 이용하려 갖은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이를 시원하게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텔레비전 방송국은 속히 민영화되어야 하고 SBS같은 TV방송국 한 50개는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편파보도를 하는 방송은 경쟁에서 밀려나야 한다. 국민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선동을 하는 방송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텔레비전은 국민의 울 권리를 막고 있다.
시위와 파업은 사고를 단순화 시킨다. 다양한 의견과 심오한 사색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하는 여론이 흑백 이데올로기, 지역감정, 진보 대 보수, 등 정쟁의 장에 밀려 깊이 생각하는 사고하는 풍조가 아예 사라지고 있다. 국민들은 단순과격화 되어가고 있다. 이 결과 언론의 혜택을 보는 층과 언론의 피해를 보는 층이 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되는 사람들은 시민대표, 시민운동가, 민주노총 파업, 지역으로는 호남이다. 언론에서 가장 피해보는 사람은 부자, 대기업, 온건한 국민, 보수단체, 영남사람이다.
유교경전의 하나인 大學에 보면 “曾子曰 十目所視며 十手所指니 其嚴乎인져.”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눈이 보고 있는 바이며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바이니 그 삼엄함이여”라는 뜻이다.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하려 하지만 그 선함과 악함은 이내 훤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것을 증자는 열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매사에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특한 일을 마음 놓고 행하고 하찮은 일이라고 해서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대중이 자기를 아는 것이 더 엄격한 것이다. 대한민국 언론이 바로 울어주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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