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누군가에 의해 남대문은 일제강압기에 우리 민족문화를 비하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서울의 사대문 중에도 오직 현판이 세로로 세워져 예를 강조하던 숭례문은 건축당시부터 남대문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최근까지 사용되어온 우리 고유의 명칭이었다. 남대문이란 용어는 우리 조상들과 함께 호흡했고 우리고전에 한양과 더불어 정감 있게 사용 되어온 살가운 고유명사였다. 이 땅의 어설픈 지식인들은 마치 남대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것처럼 떠벌이고 다녔다. 남대문이란 용어는 이렇게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어쩌면 남대문은 이런 사실에 항거나 하듯 자폭한 것은 아닐까?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분들은 잘 들어보라!
“남대문”이란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만 하더라도 198번이나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1396년 태조 5년 병자(1396, 홍무 29) 9월 24일(기묘)조에 다음과 같은 ‘남대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냈다. 봄철에 성을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한 곳을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이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사용된 숭례문과 남대문이란 용어의 첫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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