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에 탕평비를 세우자
신두환 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 시인
대한민국 국회가 전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특징은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란다.
지난주는 내내 대한민국 국회가 전 세계적으로 망신당하는 날이었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터가 좋지 않은 것인가?
우리 풍수지리설에 황천살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물의 직류를 직접 받는 곳으로 어느 누가 들어가도 반드시 좋지 않다는 곳이다.
어떤 풍수를 보는 사람은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이 한강물의 직류를 직접 받는 곳인 여의도에 자리 잡고 있어서 늘 싸우고 시끄럽다고 한다.
참 황당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국회를 가만히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연일 피 터지게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경제 불황으로 온 세상이 야단법석인데도 국회의원들은 서로 협력해 이 난국을 타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직 편 가름만 있을 뿐, 서로 원수 보듯이 철저하게 갈라졌다. 상대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못한다. 불신의 골이 너무 깊었다. 더 이상 타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한판 붙을 수밖에 상식이 안 통하면 한 판 붙어야 한다. 나는 이들을 ‘단군 이래 가장 악랄한 정치 패거리들’로 규정한다. 국회에서 폭력은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 망치와 해머, 쇠톱, 전기톱 등으로 상임위를 부수는 것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폭력을 행사했거나 쇠망치와 쇠톱을 반입했거나 동조했던 사람은 신분 여하에 관계없이 엄단해야 한다.
공자는 정(政)은 정(正)이라고 했다. 정치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다스려야 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이다. 이것이 정치의 기본 정치 논리이다.
먼저 인간이 된 다음에 정치를 하라는 말이다. 남의 명패를 내려쳐 산산조각을 내고 성질을 내며 버릇없이 노려보는 저 철없는 여성 국회의원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렇다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누가 저렇게 정감이 없고 정서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을 국회로 보냈는가?
한미 FTA 비준안 상정일인 18일 오후 대한민국 국회는 온통 난장판이었다. 품위도 체면도 국민도 안중에 없었다.
춘추좌전에 선공 15년 조에 나오는 말이다. “산과 숲이 독충(毒蟲)을 끌어안고 내와 못이 온갖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이듯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 역시 포용하지 못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지론(至論)이라고 할 것이다. 가장 먼저 이명박 대통령이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당의 단독 국회처리도 문제는 있다. 저 반대하는 무리들을 수용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 있다.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도 있지만 큰 틀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인원이 적어서 안 된다고 무지막지하게 때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이성을 잃었다. 대한민국 국회가 도를 넘었다. 나라의 기강은 땅에 떨어졌고, 원칙과 예가 사라진 것은 오래이다. 다만 통하는 것은 억지뿐이다. 저렇게 기물을 파괴하고 마음 놓고 싸워도 국회의원들은 왜 법적 구속을 받지 않는가? 국회의원들이여 제발 자정하라.
후한(後漢)의 역사를 다룬 ‘후한서’의 ‘당고열전(黨錮列傳)’ 서문에 나오는 말로 “뜻이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뜻이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구절이 있다. 우리의 정치와 너무 맞아 들어가는 말이다. 그것을 ‘당동벌이(黨同伐異)’라고 한다.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에, “바르게 해 주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완곡하게 해 주는 말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기뻐하기만 하고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 하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런 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국회의원들이 남의 말을 들을 리가 있겠는가? 아 이 국회의원들을 어쩔 것인가. 국민들이 단단히 뿔났다. 이당 저당의 당리당략을 초월하는 강력하고 새로운 탕평책이 나와야 한다.
탕평이라는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편이 없고 당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편이 없고 당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하다(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조선후기 정조는 영조로부터 부탁받은 고질적인 당파싸움을 근절시키기 위해 자기의 침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국회 앞에도 탕평비를 세우자. 그런데 누가 이당 저당을 찾아다니며 이 뿌리 깊은 정쟁을 중지하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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